마비노기의 아트 디렉터였던 이은석 PD가 듀랑고의 디렉터를 맡고 있기 때문인지 듀랑고에는 필자를 자극하는 콘텐츠들이 가득했다. 오랜만에 알바왕의 혼에 불이 붙었고 자연스럽게 정착가를 직업으로 선택했다. 목표는 농부왕.
캐릭터 설정은 여학생으로 했다. 여고생과 농사, 완벽한 조합이다.
◈ 순조롭던 초반 탐험
첫 번째 섬에 도착 후 생각했던 구도는 사유지에서 느긋하게 농사나 짓고 있으면 동료들이 재료를 가져오고 그 재료로 선심 쓰듯 무언가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이런 것을 꿈꾸며 전직을 위해 원치 않는 사냥과 탐험을 계속했다.
살육을 즐기지 않는 평화주의자 콘셉트로 진행하고 싶어서 사냥은 최소한으로 했다. 되도록 채식을 하기로 했고 육식은 생선만 섭취하는 페스코 베지테리언 (Pesco-vegetarian)의 생활을 목표로 삼았다. 별다른 위기도 없고 레벨도 제법 잘 올라서 레벨 6까지는 매우 순조로웠다.
하지만 레벨 6이 넘으면서 레벨업 속도가 급격하게 느려지기 시작했다. 연약한 농부왕 지망생은 3레벨 섬에 머물 수밖에 없었고 3레벨 섬은 대부분 남이 정복한 상태였다. 다른 유저보다 늦게 시작한 데다 굉장히 느긋하게 진행한 것이 화근이었다.
◈ 기승전꼬치
이후에는 탐험이 아니라 방황이었다. 목표가 없었다. 게임을 하기 위한 기본 요소인 정보수집조차 하지 않아서 뭘 해야 할지도 몰랐다. 먼저 출발한 유저들이 한바탕 휩쓴 후, 남은 게 없는 3레벨 섬을 정처 없이 배회했다. 배가 고파지면 산딸기 따위를 주워 먹었고, 채식으로 버티기에는 체력이 너무 부족해서 가끔 생선을 잡기도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모든 음식은 날것으로 먹을 때는 복통과 설사 등 여러 가지 부작용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야생의 환경에서는 더 위험할 것이다. 하지만 가열하면 그런 위험이 많이 줄어드니 배가 고프다고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요리해서 먹도록 하자.
정착가도 되지 못한 초보 모험가가 할 수 있는 요리는 꼬치구이밖에 없었다. 다행히 꼬치구이에 필요한 도구는 나뭇가지와 식재료뿐이라 쉽게 만들 수 있었다. 꼬치를 구우면서 놀라운 것을 깨달았다. 의미 없이 돌아다니는 것보다 꼬치를 굽는 편이 더 많은 경험치를 얻을 수 있었다. 그 뒤로는 먹기 위해서가 아닌 성장하기 위해 꼬치를 구웠다.
◈ 초보 농부 지망생의 첫 고난
드디어 10레벨을 달성했다. 진정한 정착가가 되어 내 밭을 일굴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기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졌다. 밭을 일구기 위해 진흙 또는 흙이 필요한데 이는 레벨 10이 되도록 본 적이 없는 자원이었다. 수소문해보니 온대기후의 섬에서 삽을 이용하면 진흙을 채집할 수 있다고 한다. 허약한 농부 지망생이지만 밭을 일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기로 했다.
온대기후의 섬은 항구 대부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섬에 도착해서 미리 준비한 삽으로 진흙을 채집하려고 했더니 채광 스킬을 요구했다. 스킬 포인트는 넉넉하니 스킬창을 열어 확인하지만, 채광 스킬은 없었다. 채광은 탐험가의 전유물이었다.
삽을 만들고 섬을 헤매던 시간이 무의미해졌다. 동료들에게 진흙을 구해달라고 했지만, 같이 플레이했던 네 명 중 탐험가는 한 명이고 그마저도 바빠서 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상점을 이용하기로 한다. 무려 1000 티스톤에 진흙을 두 덩이 구해서 겨우 밭을 만들었다. 진흙 두 덩이에 전 재산을 날렸다.
◈ 종자를 위한 여정, 그리고 첫 수확
밭이 있다고 해서 아무거나 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마저도 초보 농부는 옥수수 외에는 선택지가 없고, 옥수수라고 해서 쉽게 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먼저 종자, 씨앗을 구해야 한다. 다시 동료들에게 종자를 요청했지만 아무도 없다고 한다. 참 도움이 안 되는 동료들이다. 물론 나도 그들에게 도움을 준 적은 없지만 말이다.
연약한 농부지만 10레벨 섬에 도전하기로 한다. 10레벨 섬은 매우 위험하다. 이곳에 있는 공룡은 비교적 온순했지만, 조금이라도 놀라게 하면 바로 공격해오고 걸음이 빨라 도망치기도 어렵다. 몇 번을 부활하며 섬 곳곳을 뒤져도 손에 넣은 것은 스팸과 빗자루뿐이었다. 채식주의자에 대한 의지는 오래전에 사라졌기에 그냥 고기를 먹기로 했다. 역시 남의 살이 제일 맛있는 법이다.
탐험을 포기하고 사유지로 귀환해서 상점을 뒤져봐도 종자는 좀처럼 올라오지 않는다. 나와 같은 고충을 겪는 농부들이 많은 것 같았다. 이때 동료가 옥수수 종자를 구했다고 하기에 서둘러 달려가 종자를 받아왔다.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은 취소다. 정말로 믿음직한 동료다.
파종 후 옥수수를 심고 3분을 기다려서 첫 수확을 했다. 종자 3개와 식용 옥수수 4개를 얻었다. 큰 성과다. 드디어 농부왕을 위한 첫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아직은 밭이 한 칸밖에 없는 빈농이지만, 꾸준히 노력하면 자연이 나를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농사일에는 많은 체력이 필요했다. 혹여나 수확에 실패라도 하는 날에는 작은 밭 하나 수확하는 데 꼬치구이 두세 개 분량의 체력이 날아갔다. 옛 조상들의 엄청난 식사량이 이해가 됐다.
◈ 50/50
두 번째 수확은 종자 2개와 옥수수 5개였다.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뿌듯했다. 그러나 세 번째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수확에 실패한 것이다. 수확물이 있어야 할 자리에 뽑기라는 잔인한 버튼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당황했으나, 곧 마음을 다잡고 다음 수확을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작물에 물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수확에 성공했기에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다만, 비가 오는데도 물을 줘야 했던 점에는 다소 의문이 남았다. 테스트 중인 게임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뭐.
파종 후 물을 주고 다시 3분을 기다렸지만, 또다시 실패했다. 이제는 기준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밭에서 수행할 수 있는 행동은 씨앗 심기, 물 주기, 수확, 뽑기, 제거뿐이다. 이 중 수확 전에 할 수 있는 행동은 씨앗 심기와 물주기 뿐이다. 거름을 주거나 김을 매는 등의 행동이 없어서 할 수 있는 건 씨앗을 심고 물을 준 다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던 중 한 가지 당연한 사실을 눈치챘다. 듀랑고는 게임이고 스킬이 있다. 즉, 스킬 레벨이 낮으면 성공률이 낮아지는 구조이다. 처음 두 번의 성공은 그저 초심자의 행운에 불과했다. 의문은 풀렸다. 열심히 농사를 짓다 보면 스킬 레벨이 높아지고 성공 확률도 올라갈 것이다. 언젠가는 익숙해질 것으로 생각하며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 농부왕을 위해
시간이 지나며 상점에 올라오는 진흙의 가격도 점차 낮아졌다. 처음에는 1,000 티스톤을 주고 샀지만, 나중에는 200 티스톤에 살 수 있었다. 옥수수 종자도 슬슬 상점에서 찾을 수 있었기에 밭을 늘리기로 했다.
테스트가 끝나는 시점에는 총 7개의 밭을 갖고 있었다. 듀랑고에서는 무조건 많은 게 능사는 아니다. 밭이 늘어나면 그만큼 소모하는 체력도 많아진다. 다량의 식량을 확보해둔 상태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사실 정착가를 선택한 것은 여왕벌로 군림하며 다른 모험가 동료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내가 노예였다. 정착자가 한 명뿐이었기에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농사짓는 것만으로도 매우 바쁜데 동료들이 주워오는 재료는 점차 늘어가고 재료와 함께요구도 늘어났다. 다음 테스트나 정식 출시 후에는 체계적으로 준비해서 제대로 된 농업 시스템을 구축하고 싶었다.
듀랑고는 오랜만에 알바왕의 피를 끓어오르게 해줬다. 특히 뚜렷한 개성의 세 직업은 이은석 PD가 말한 진정한 MMO가 무엇인지 잘 설명하고 있었다. 각각의 직업이 가진 역할이 뚜렷해서 협동하지 않으면 듀랑고를 제대로 즐길 수가 없다.
모든 콘텐츠를 경험해보지는 못했지만 나름 만족할 만큼 즐길 수 있었다. 완성된 듀랑고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등록순 최신순 댓글순